病棟/내가 좋아하는 책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Re-Happy-Doc 2008. 9. 19. 09:21

 

 

요즘에 나의 화두는 "기득권"이다.

 

이덕일은 말한다.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생명체처럼, 자율성을 띄면서 무던히도 현실에 까지 개입하고,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문제는 현재와 미래는 인간의 노력이 개입될 여지가 있지만, 과거는 그런 노력의 손이 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누구나 그렇듯 군대에 있을때, 많은 일이 있었다. 참 지루한 일상이지만,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황당한 일을 한번쯤은 경험해 볼필요가 있다고 자위하곤 했던건 같다. 또 어떤일을 집중할 시간은 없지만, 짜투리 시간이 많이 있어 책을 보거나, 대학시절을 되새김질 하는 시간이 있엇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던 책들이 조선시대 선비들에 관한 책들이었다. 왜냐면, 조선시대 수많은 대립이 있었으며, 그 대립 중에서도 많은 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내 앞의 선배들이 왜 대학을 졸업하면 일상으로 접어들까?라는 것이 고민이있다. 물론 지금은 그것에 대해 해답은 내린 터였지만, 당시에는 "세상이 뭐라하던 제 갈길을 가는" 선배들의 정신 세계가 참 많이 궁금했다.

흔들리는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며 읽었던 책들이-"우리가 알아야 할 선비", 대산 김석진 선생의 "스승의 길 주역의 길","조선시대 유학논쟁" 기타 조선시대 유학의 흐름에 대한 책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이  선비들이 가진 지조나 덕목에 집중한 책들이었으며, 송시열에 대해서도 그가 조선시대 후기에 미친 영향력을 예를 들면서, 그의 修身에 대한 노력에 대한 극찬만을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보면, 나는 발을 딛고 있는 전신의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머리만 본 것 같다. 사실 그렇다. 그들의 말하는 대의 명분이나 신념 또한 절대적인 악에 대한 투쟁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당파에 대한 적극적인 이익 옹호라는 것이 지금 생각이다.

  나는 요즘에 이덕일의 글을 주로 읽는다. 지금 소개하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을 비롯하여,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 사도세자의 고백", "정조, 철인정치 시대" 등을 읽었다.  신채호의 역사관인 "我와 彼我와의 투쟁", 토인비의 "창조적 소수자와 지배적 소수자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시대 인조반정 이후를 규정한다면, 서인-노론 기득권과 왕권간의 대립으로 볼 수 있겠다. 그는 인조반정은 가장 반역사적인 과거라고 규정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는 자기를 정당화 한다. 조선시대 서인 이후 노론이 어떻게 나라를 망쳐왔는지 이후 일제시대를 거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삼한갑족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제공자가 누구인지,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인조반정은 전두환과 그들의 12-12사태처럼 정통성이 결여된 쿠테타였다. 민중이 원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고, (물론 민중이 원했다고 무조건 정당성을 얻는 것도 아니지만) 당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서인들이, 자신의 정권 탈취 목적으로 북인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들은 이이와 성혼의 학맥을 이엇다고 하지만, 이들이 정권을 획득하고난 뒤부터, 이이의 진보적인 경장사상을 잊은채, 급격히 보수화가 되어 간다. 또한 이들은 "재조지은"의 명분아래,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친명정책을 고수하여, 청나라로 부터 두번이나 국토를 유린당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효종, 송시열, 이완 등이 북벌론자라고 하였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집권 서인은 실제적으로 북벌론이 아니었다. 조선이 청나라와 전쟁하게 된다면, 가장 크게 타격을 받는 것은 바로 서인 집권층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명분은 친명배청이었지만, 사실은 "소중화 사상"으로 중국이 오랑캐의 나라가 되었으니, 자신들에게 중국 성리학의 법통이 이어져 왔다는 궤변으로 자위한 인간들이었다.

  인조 이후,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사도세자 및 정조까지, 이들의 정권 유지에 있어서 서인 및 노론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아니 이들이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시대였다.  이 시대 이후 왕들은 그들의 지지와 협력 혹은 적당한 긴장관계 속에서 정권을 유지하게 된다.  송시열은 이 모든 갈등유지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한 한 사람이다. 그가 개인적인 수신이나 제가는 훌륭하였을 지 몰라도, 치국만큼은 당파적이었으며 그의 철저한 당파성은 조선 후기 및 현재까지 한국 사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덕일 본인이 이야기 하듯이, 죽은 후  200년 이상 송시열과 그의 지지자들이 위정자들이었고, 심지어 노론과 적대적이었던, 정조마저도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죽은 그에게 "송자(宋子)"라는 유교식 극존칭을 부여할 정도로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그리하여, 송시열과 그들의 내력을 살펴보면, 인조반정이후, 정묘, 병자호란, 기사, 갑술환국을 거쳐 사도세자의 죽음을 거쳐 드디어 그들은 왕권을 재치고 권력의 전반을 장악하게 된다.

 그 송자의 후예들이 나중에는 친일파가 되고 현재의 집권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나라는 노론이 망쳤는데, 독립운동은 남인과 소론이 한다" 라는 이회영의 말처럼, 북벌론과 소중화사상을 주장했던 그들이지만, 그들의 후손은 나라를 넘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들의 후손의 기득권과 나라를 넘기는 것은 무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후손은 아직까지도 기득권을 가진 우리 사회의 핵심 계층이다.

한편  효종이후부터 일제시대 전까지 갈등의 핵을 구축했던 송시열과 그들- 그리고 그 적들 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어찌보면, 우리는 송시열과 그들과 그들의 적과의 대립의 역사적인 경험과 아주 무관하지 않는 것 같다. 송시열과 그들-그리고 그들의 적들이 민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복의 착용기간으로 싸�던 투쟁처럼, 우리의 과거에도 그랬다. 나의 대학시절은 조금 조용해져서 그런지, 그렇게 싸울만한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 이전에 선배들은 그런 사상투쟁에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또한 그런 싸움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 같았다.

 결국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던 사람들이 흩어진 것은, 그들의 원했던 민중이 해방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발딛고 있는 현실이 강제했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그들이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산림(山林)에 지주로써 경제적 기반이 있었던 것 처럼, 80년대 학생들이 혹은 투쟁가들이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지식인이라는 기반이 존재하였으며, 논쟁을 통해 그들의 입지적 존재에 큰 배경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3000번 이상 회자되는 송시열, 공자,맹자 그리고 주자에 버금가는 이름으로 송자라는 극존칭을 받았던 송시열, 그러나  최근까지도 경상도 남인 지역에서 자기집 개이름으로 "시열이"라고 불렀다.  나는 조선시대 치열한 사상투쟁에 극단에 섯던 한  識者의 생애를 통해서, 오늘을 되새김질 한다. 도대체 환란의 시대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어떠한 것이가를.  

 마지막으로 지식인들에 대한 인조의 말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 몸을 닦고 글을 읽는 것이 너희들의 일이다. 잘 모르는 일을 억지로 논하다가 남들의 비웃음과 모욕을 사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