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호접몽(胡蝶夢)

Re-Happy-Doc 2011. 9. 15. 22:20

서울은 바다였다. 나는 민물의 비릿함을 그리워하는 어린 연어처럼 대학 졸업 상경한 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경상도 억양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를 만난 것은 전공의 3년차 때였다.
샘예. 우리 아들 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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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의 엄마가 강한 경상도 말투로 밝은 얼굴로 아침 회진 , 인사를 했다. 서울에서는 같은 고향이 아니라도, 같은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기억도 강렬하다.

아이를 안은 엄마의 모습은 피에타 성모상이었지만 표정은 구세주를 만난 듯한 기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친구의 이름은 J,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사내아이, 집은 부산이라고 했다. 기관 절개를 하고 있었고, 갈비뼈가 도드라진 늘어진 팔과 다리가 파닥이고 있었다.

척수성근위축증- 선천적인 신경의 이상으로 태어날 때부터 바로 호흡곤란으로 사망하는 경우에서 걷다가 나중에 근육이 말라 힘이 빠져 장애를 겪는 경한 형태까지 다양하지만, J 중증이었다. 재활의학수련을 받기 전에는 이런 유전 질환을 접할 , 오랜 습관처럼 절망했다. 대학시절 배운 병리학은 유전 질환이란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가장 빠른 경로라 하였으며, 인간의 힘으로 어쩔 없다는 필연성을 강조한 문구들로만 나열되었다.

수련하면서 내가 재활의학과에 내원한 신경, 근육병 환자들은 대부분 유전병이었다. 이런 병들은 부모의 존재로 인해 병이 발생하므로, 대부분 보호자들은 침울하다. 그러나 J 어머니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이었다.  

샘예, 부산서, 여기가 본다고 해서예. 우리가 왔다아닙니꺼. 예가 봄에 감기가 걸리더니만, 폐렴에 걸려, 죽을뻔 했다아입니꺼. 그래서 중환자실에 가서 목을 뚫었지예. 이번에 막게 해주이소. 얘가 말을 못하니 지도 답답하고예. 매일 가래를 뽑아내이, 얘도 너무 힘들어 합니더.”

보통 기도 절개 삽관이 경우는 목이 자극이 되어 침이나 가래가 더욱 많이 생기기 때문에, 오히려 폐렴이 걸리기 쉽다. 신경근육계 병을 가진 환자들은, 근력이 약해 자발적으로 객담배출이 어렵기 때문에, 일단 삽관을 하면 제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환자와 보호자 교육을 통해, 다른 방법으로 객담 배출이 가능하다. 교육이 끝나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이비인후과 협진을 통해 기도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 삽관을 제거하게 된다.

여름 J 무던히 견뎠다. 그리고는 삽관을 제거하고 밤에는 코를 통해 인공 호흡기를 통한 호흡 보조를 시행하였다.  
샘예. 얘가 이제 말을 한다아닙니꺼. 너무나도 기분이 좋십니데이. 샘한테, 인사 안하나?”
그러자, J 한마디 한마디 물기 없는 행주를 쥐어짜는 듯이, 얼굴과 목을 뒤척이며 말을 건냈다.  
선새~~~에임. 안녀하세요.”  
밥을 삼킬 힘도 없어서 멀건 죽을 먹던 J, 폐렴 예방을 위해 위조루술을 시행하였다.
그래도예. 샘예 지는예. 예가 말을 하는 것을 다시는 못볼줄 알았다 아닙니꺼. 덕이지예.”
마침내 J 삽관을 제거하고 인공호흡기 처방과 조정을 다시 받고 퇴원을 했다
그러나 퇴원 며칠 갑자기 J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샘예. 예가 갑자기 시퍼렇게 질리더니만, 숨이 넘어갈라케서예. 예기 P대학병원인데, 소아과에서 일단 기도에 관을 집어너었는데예. 막힌 목을 다시 뚫자카는데 어떻게 할까예.”
낭패였다. 전화상으로는 J 상태를 없었다. 일단 나는 P대학병원 전공의와 전화 통화를 ,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교수님께 보고드렸다. 교수님께서는 일단 서울에서 상태를 확인한 다음 조치를 진행하는 것이 어떻냐고 하셨다.  J 어머니에게 설명을 드리고 빨리 서울로 오실 것을 말씀드렸다.
초조했다. J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5시간 걸려 부산에서 서울까지 달려왔었다. 10시에 응급실에 나타난 J 기도 삽관을 하고 괴로운 고개를 좌우로 뒤척였다.

다음날 아침, 교수님께 보고를 드리자, 교수님께서는 아침 회진 시간에 여러 가능성에 대해서 보호자에게 설명을 하셨다. 그러나, 교수님도 보호자들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샘예. 다시 뚫으면, 나는 목소리를 다시 못들을 아닙니꺼. 제발 잘해주이소.”
이비인후과서는 일단 기도 내시경을 통해,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그러나 J 자발 호흡 능력이 미미하기 때문에, 기도 내시경 중에 위험에 빠질 있어 수술실에서 진행하기로 하였다.

수술실로 J 옮기고 초초한 마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수술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다행히도 기도에 육아조직이 자라서 기도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기도 삽관으로 인한 염증이 남아 있어, 일시적으로 기도가 좁아졌다고 했다. 약물 치료를 통해 염증만 조절 하면 다시 기도 절개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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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J 다시 퇴원하는 어머니는
샘예. 너무 고맙십니더. 부산에 내려오이소. 제가 맛있는거 사주께예. 그리고 장가가면 연락주이소. 내가 가께예.”
나는 고향으로 휴가차 내려갈 부산에 들리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나와 인연이 맺어진 J 어머니는 방학 때마다 호흡기 상태와 몸상태를 점검하러, 입원했다. 수련과정상 나는 순환 근무로 다른 병원에 가게 되어, 어머니와 J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J 어머니는 서울에 때마다 나에게 안부 전화를 하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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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이 지나고, 수련 마친 일산의 종합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J 대한 기억들도 가라앉고, J 어머니의 연락도 뜸해 졌었다. 전문의가 되자, 이제 이름 석자를 외래 챠트에 자신 있게 쓰게 되었지만, 편으로는 전공의 시절의 치열함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 인생에 있어 가장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변변한 연애 경험이 없던 나는, 여러 여인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성급한 결혼을 준비 , 그만 파혼을 하게 되었다. 세상 살면서 착하게 살고 싶었는데,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괴로움과 자괴감으로 가득 했다. 죽고 싶었다. 매일 폭음과 흡연으로 불면의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샘예. 살고 있어예? J 엄마입니더. 장가간다는 소리 않합니꺼. ”
어머니는 J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여름 휴가 J 보러 부산에 내려오라고 했다.

삶과 죽음’.
2009
봄은 때이른 더위가 부산했고, 다른 죽음으로 인해 나라가 힘들어 했다. J 보고 싶었다. 아니 내가 살고 싶었다.
8
중순에 이르러 J 만나러 부산에 내려갔다. 지하철역입구에서 J 아버지를 만나 J 집에 들어갔다. J 이제 6학년, 파닥이던 J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힘들게선생님이라고 부르던 혀도 이제 잎사귀처럼 가늘어 , 겨우 호흡기 바람 소리와 섞인 신음 소리만 내고 있었고, 밤에만 쓰던 호흡기도 낮에 하지 않으면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J 어머니는 시종일관 표정이 밝았다.

여까이 오신다고 고생 많았지예. 얼굴은 그대로네예. 아직 장가도 안가고 뭐합니꺼. 제가 좋은 아가씨 중신 주까예?”
J
간혹 내는 신음 소리를 나는 분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음식 준비와 설거지 중에도, 등가렵다고 끍거주까. , 소변 보고 싶다고. , 돌려달라고.” 하고 알아 듣고 J에게 다가가선 돌보고 했다.
점심식사 , J 누나에게 맡겨두고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낮부터 횟집에서 술을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즐겁게 살아가는지 궁금했었다.
요즘에, 저는 살기 많이 좋아졌어예. 아침마다 학교에서 봉고차가 와서, J 실어가지예. 학교는 때문에 층마다 경사로 만들었지예. 보조 교사가 있어서, 수업시간에는 예만 본다아닙니꺼. 예전처럼 제가 엎고 호흡기 옆에들고 학교안가도 됩니더.”
부산 앞바다에 J 이렇게 뒤로 부부가 같이 놀러 적은 있느냐고 내가 물었다.
, 친구들이, 번은 부부같이 놀러 가고 우리가 J 볼께 카면서 하는데예. 그래도 내가 없으면, J 우짭니까. 걔들은 J 하는 무슨 말을 알아듣지 못하잖아예. 그냥 제가 보지예. 그래도 괘않심다. ”
부부는 오히려 병을 진단 받기 전이 힘들었다고 했다. 6살까지 멀쩡히 자라던 J 갑자기 넘어지고 걷기 힘들어 했다. 전국에 이름 있는 병원은 가보지 않은 데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J 초등학교 1학년 무렵, P대학 신경과에서 척수근위축증으로 진단받았다고 하였다.
그때는 , 마음고생 많았심니다. 연년생인 동생이랑 놀다, 애가 , 서서히 걷지 못하는데, 진단이 되어야지예. 의사들은 모르겠다만 카고. 근데 지금은 괞찮아예. 우리 J 그래도 얼마나 머리 좋고 똑똑 한데예. 위로 누나고 동생이고, J 생각하고 챙기는 보면, 우리가 고맙지예.”

나는 있었던, 내가 지은 잘못과, 이제까지 망가진 삶과 회한, J 어머니 전화가 얼마나 고마웠는지를 그들 부부에게 이야기 했다. 내가 J 보러 것은 J 때문에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싶어서 부산에 내려왔다고 했다.  
인연이지예. 인연이 아니니까, 그러지예. 지나간 일은 이자 뿌이소.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를 수도 있는 거지예. 그리고 내가 잘못했다카고 받아들이소. 다시 좋은 사람 만나면 되지예.”
저녁, 부산을 떠나면서 다시 J 누워있는 침대로 갔다.
“J
. 잘있어라. 나중에 내가 부산에 보자.”
J
아는 , 눈만 가까스로 깜박였다. 녀석의 입술은 역류된 호흡기 바람로 인해 떨리고 있었고, 입주변에는 흐르는 침과 마른 딱지가 얼룩이 되어 있었다.
, J 어머니에서 연락이 왔다. J 여전히 지내고 있다고 했고, 집안에도 별일이 없다고 했다. 창원 J 할아버지 댁에서 농사한 감을 보낸다고 했다. 이틀 , 외래 책상에 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호접몽의 주인공처럼, 내가 환자인지, 환자가 의사인지, J 만난 여름과 올해 여름, J 나는 서로의 조각난 삶을 이어 주었다. 오늘도 나는 재활병동에서 다른  J 어머니를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