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
어떤 요리사가 있었다.
그 요리사는 자신 만만하였다. 자기의 요리는 어떤 사람도 만들 수 없는 최고의 요리라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손님들은 달랐다. 어떤 사람은 맛있다고 하기도 하고, 별 말이 없이 먹기도 하였으며, 혹은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반성을 하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기로 하였다. 어떤 사람은 달게 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또 다른 이는 매콤한 것을 좋아하는 이도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약간은 짠 맛을 좋아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기호를 기록하여,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님의 성향과 특성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중에 그를 찾는 이가 점점 많아져, 그는 더욱더 이름난 요리사가 되었다.
전공의를 가르치는 지도 전문의의 입장이나, 환자와 보호자를 설득을 해야 하는 주치의의 입장에서 나는 어제 여행길에서 친구에게서 들은 요리사의 이야기에깊은 공감이 되었다.
나는 전공의 시절 환자들에게 착한 말과 좋은 말을 하는 좋은 의사가 되고 싶었다. 안그래도 힘든 인생 장애를 가지고 산 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그
러나 3년차때 생각이 바뀌게 된다.
내가 수련받은 세브란스 재활병원은 수련환경이 엄하고 힘들기로 유명하다. 그 중에도 내가 존경하는 신지철 선생님 밑에서 수련 받을 때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한다. 나는 그 때 치주염으로 고생을 엄청하였지만, 재활병원 옆에 가까운 치과 병원을 두고도 가지 못하였다.
김OO. 이름도 잊지 않는다. 강원도 삼척 사내, 결혼 3일을 남겨두고 오토바이 사고로 경수 척수손상과 외상성 뇌손상을 당하여 우리 병원을 입원하였다.
은사님은 이렇게 불쌍하게 된 사내나 가족들에게 부드러운 말투나 어조가 아니라, 항상 고압적인 말만 하셨다. 그 누이와 어머니는 그 때마다 어떻게 할 줄 몰
랐으며, 자기 아들이나 동생의 불행보다도 더 의료진의 태도에 대해서 불신하는 분위기 였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워서,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될 수 있으면 상
처를 주지 않아야 겠다고 마음으로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러자 그 은사님은 하루는 나를 불러 꾸중을 하였다..
"너는 너 환자를 보는 거냐? 내 환자를 보는 거냐? 니만 환자한테 좋은 말 할 줄아냐? 니가 그렇게 보고 싶으면, 전문의가 되어서 니 환자 봐. 지금 나이가 27
살 사람이 저렇게 되어서 받는 돈이 얼마인 줄 아느냐? 4억에서 5억이다. 평생 저렇게 누워서 식물인간 같이 지네는 데 그 돈 받아서 어디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 살 돈이 나오냐? 이 사람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이병원 저 병원에 돌아다니면, 그 보상비는 모두 병원에 가게 되고, 결국에는 이 돈 보다도 그 사람
이 받는 돈이 적어진다. 그리고 브로커들이 붙어서 보상비의 10%를 떼먹는다. 결국 사람이 저 모양이 되었는데, 다들 돈잔치만 하고 환자는 결국 방치된단
말이다. 빨리 보호자 교육하고 보호자들에게 주택 개조를 해서 환자를 편히 보게 끔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너는 왜 내일을 이렇게 방해하냐?"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결국 중증 장애 환자들은 이 병원 저 병원을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떠돌아 다니다 결국 가족이 지치면 내팽겨 치는 모습을 많이 보아온 나
로써는 나의 짧은 소견을 반성을 하면서, 환자들에게 부드러운 말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닌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 유명한 스님에게 어떤 사람이 가훈을 써 달라고 했다.그러자 그 스님은
"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죽는다."라고 써준다.그러자 부탁을 했던 사람이 화를 내면서, " 아니 좋은 말도 많은데 왜 하필 죽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까?"
"그럼, 반대로 아들이 죽고, 아버지가 죽고, 할아버지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모든 것이 순리대로 내려가면 마음의 고생은 없어진다. 환자가 보통 고령의 부모이면, 자식들은 이런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행동을 된다. 보호자의 경제적 상태가 좋거나 혹은 환자의
신체적 상태가 좋으면 재가 요양을 하지만, 돌볼 가족이 없거나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 돌보기가 어여우면 요양병원에 모시고 경제적
형편이 어렵다면 요양원에 모시기도 한다.그러나 재활병동에 있는 환자들 중 상당수는 이 순리를 거스르는 , 부모가 건강하고 자식이 쓰러지는 경우에는 문제가 1800도 달라지게 된다.
내가 전문의가 되자 32살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된 환자가 입원을 했다. 전남 여수 출신 32살된 사내인데, 사법시험 준비하다 뇌출혈로 쓰러져 있는 것을 늦
게 발견하여 저산소성 뇌손상까지 온 환자였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의료진이 해줄 것은 없어진다. 단순한 관절 운동 치료하고, 보호자 교육, 콧줄로 영양급식
을 하면 보통 뱃줄을 뚫어 영양공급을 하는 것이 전부. 무엇 보다도 보호자가 환자가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납득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여겨저기 떠돌아 다니다 2년 지나면 보통 갈 데가 없어져 집으로 가게 된다. 보통 2년까지는 의료보험 체계에서 지원을 해주어서 병원에서 입원을 시켜주지만 2년이 넘고 큰 차도가 없는 환자들에게는 보험 지원이 많이 줄어들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이런 환자를 보통 입원장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환자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보호자들은 2년 지나면 갈 데가 없어진다.
근데 그 환자의 부모는 그것을 받아 들이지 못했다.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고 믿으며, 거기에 반하는 언사를 들었을 때 공격적으로 바뀌게 된다.나는 입원하자마자 보호자에게 면담을 제안하였다.이 환자는 이 상태 이상으로 좋아지지 않으니 여수에서 그냥 환자를 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고 콧줄에서 뱃줄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 했으나, 보호자는 들은 척 만척했고 보통 회진때는 인사를 하거나 아는 척을 하는데, 보호자들은 나에게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 물론 나도 잘못이 있었다. 나이 그윽한 노인 분들에게 경상도 말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했으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보호자가 내 치료 방침에 거부하니, 나도 특별히 해 줄 것이 없어졌다. 그래서 관절 운동을 하고, 시간에 맞추어서 퇴원시키기로 하였다. 당시 우리 병원 규정상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경우 입원 치료는 8주만 가능하였다.
이후 환자는 퇴원하였고, 나는 그 환자에 대해서 잊고 지냈다. 보통 이렇게 의료진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나도 추후에 환자 보기가 어려워 진다. 이후 외래를 보고 있는데, 보호자가 다시 나타났다. 보호자는 나에게 입원을 다시 요청한다. 나는 다시 설명을 하면서, 환자는 앞으로 좋아질 상황이 아니니, 다른 병원으로 입원할 것을 권유 하였다. 보호자는 낙심을 하면서 돌아갔다.
주말에 내가 외래를 볼 때, 다시 그 보호자가 나타나서 또 다시 입원을 요구하니, 나도 강한 어조로 “ 저는 환자에게 입원장을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설명을 드렸는데, 왜 또 자꾸 그러시냐고 질책을 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존대말을 쓰든 환자의 아버지가 반말로 이야기 하면서 “ 이 새끼가 나이가 얼마먹었다고 지랄이야. 나도 너 보다 잘나가는 아들이 있어, 나는 공무원했기 때문에, 연금도 나와서 굶어죽지 않아. 너도 자식 낳으면, 병신될꺼야.”
그날 나는 자식을 낳아야야 한다는 생각을 거세를 하고 말았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한다면 낳아서 무엇하겠는가? 라는 반문을 하였다. 주위 의사 선생님도 자식이 별탈없이 자라서 걱정이 없는 분도 있지만, 이런 저런 병과 장애로 마음 고생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나는 환자를 위해서 그런 말을 했는데, 왜 그 보호자는 그랬을까?
친구의 요리사의 비유가 옳은 말이었다. 내가 옳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내가 거기에 맞추어야지, 그 사람이 거기에 맞출 수는 없다.
경험이 있고 실력이 있는 의사는 바로 이러한 사람일 것이다. 자기 기준이 있지만, 그 기준을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하는 것....... 의사가 힘들지만 재미있고 보람있는 것은 죽을 때까지 사람에 대해서 고민하는 점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