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Happy-Doc 2013. 3. 22. 12:13

 


 여인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미혼 때보다는, 비록 이마와 눈가에는 잔주름이 있을 지라도 자식을 낳고 기르는 동안 모성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주로 관찰된다. 재활병원에 있으면 여성의 위대함을 늘 보게 된다. 세상의 법칙이라는 것이 단순해서, 아버지가 쓰러지고 아들이 쓰러지게 되어 있으며, 필시 남자라는 동물은 강한 것 같아도,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이가 들어도 어린 아이처럼 유치한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여자는 다시 어린 아이가 된 아들이나, 손자같이 응석받이가 된 남편을 위해서 칼잠자는 것을 마다하고 대소변을 치우는 것을 보면, 겨울을 이기는 대지처럼 여자는 남자보다 강한 동물이 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내가 그녀를 본 것은 외래였다. 짙은 쌍커풀에, 예쁘게 단정한 손톱 매무새로, 해맑은 모습은 중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호기심 많은 상큼 발랄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발 앞부부의 통증 땜에 외래에 내원하였다. 항상 밝은 모습으로 응답을 해서 이 분이 진짜 아픈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하루는 서울 각지에 발병을 전문으로 보는 병원에서 받은 깔창이며 보조기를 여러개 들고 오는 보면서, 정말로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구나를 알 수 있었다.  (그 사진은 내가 사진으로 찍어서 전공의 교육으로 쓰고 있다. )

X-ray 검사도 하고, 초음파 검사를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를 해도 특별히 나아지는 것이 없어서, 내심 나는 조바심이 낫지만, 오히려 그분은 조급한 내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해주시는 듯, 방긋하게 환한 웃음으로 화답을 했다. 덕택에 나도 고민을 많이 했다."이여인이 아픈 이유가 무러까? 나의 진단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혹은 빠진 검사는 없는지..... 그러나 그 녀는 시원하게 낮게 해주지 않는 의사를 몇 시간이나 기다리면서도 지루한 표정을 짓지 않으면서도 꼬박꼬박 진료를 받고 갔다.

좀처럼 낮지 않자, 나는 carbone graphite insole을 처방을 했다. 이 깔창은 처음부터 끝까지 딱딱한 재질로 되어 있어 발가락 관절 자체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특징이 있다. 보통 발가락 관절염이 있는 환자에게 주로 처방하는 보조기인데, 1주가 지나서 다시 본 외래에서 그녀는 깔창이 효과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약간의 미안한 감정- 그 깔창은 비싸다.-그리고 나도 이제까지의 진료본 의사처럼 무심코 깔창만 처방한 것이 아닌가? 자괴감이 들고, 그리고 효과도 없는 깔창을 비싼돈을 주고 사게 만든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샘플로 있는 실리콘으로 된 깔창을 그냥 드리면서, 이것으로 효과가 있는지 보자고 했다.

 

그렇게 2주뒤에 그녀는 다시 나의 외래에 내원하였다. 그리고서는 그녀는 이전과는 달리 통증이 많이 좋아져  그녀가 성당에 갈 때, 발이 아프지 않아 너무나도 좋다고 이야기 하였다.

 

나는 무심코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이전에 고생시킨 마음도 있고 해서 " 이것은 제가 낮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낮게 한 것이지요."

 

그러자 그녀는 "이전에도 선생님은 독특하게 말씀하셨어요. 다른 선생님들은 병을 낮게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병을 낮게는 못하지만, 병을 가지고 사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기억하고 있어요." 라고 대답을 했다.

 

" 그렇죠. 재활의학과는 장애를 없애는 과가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과이지요. 저는 만약에 발에 통증이 있어 걷기나 달리기를 못한다면 차라리 자전거를 타고 다니라고 이야기 하는 과입니다."

 

"그렇죠. 어디에 가면 차를 타고 가면 되지만, 저는 꼭 성당만큼, 하느님에게는 걸어가고 싶어서 였습니다. 그래서 발병을 치료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

 

그 말을 듣고 난 뒤, 먼가 느낌이 있었다. 항상 밝은 표정의 여인이, 약간은 얼굴이 숙연해지면서, 무겁게 바뀌었다.

 

"언젠가 이야기 했죠. 저희 애 아빠도 의사였다고, OO의료원에서 근무했었는데."

 

사실 내가 인턴했던 병원이어서, 나도 잘 알고 있었다. " 무슨과를 하셨는지요? 저도 그 병원에서 인턴하고, 인턴대표까지 해서, 어떤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자,

 

"애 아빠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눈가가 촉촉히 젖어 드는 것이었다.

 

"원래는 일원동에 살았어요. 그 때 애 아빠 친구들이 남편이 저세상으로 가니,  위로차 얼마나 집에 오는지. 제가 요리를 좀 잘하거든요. 그래서 그 분들이 한 번씩 찾아오면 식사 대접도 하고...... 그런데, 남편이 잘 잊혀지지 않고, 그래서 친정어머니가 계신 김포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김질 하였다.

 

"남편도 학생시절 부터 운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대학교때 만나서 결혼을 했구요. 제주에서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도 많이하고, 그래서인지 예방의학을 전공을 했어요. 선생님을 보면, 머리카락이나 이제 난 흰머리가 꼭 저희 남편과 같았어요. 워낙 대쪽 같은 사람이어서, 자기가 옳다는 바에 대해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어요. "

 

나도 한 때 운동가였다고 이야기하고, 인의협 회원으로 아직까지 있다고 하자. " 남편도 아마 인의협 회원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의사 파업때도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하자고 이야기 했었고, 그 때 강연회가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님을 모시고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의사의 본분이 무엇인가? 아마 그 때, 아빠가 의사 파업때 무마하려고 많이 애를 많이 썻던 것 같아요."

 

눈물을 몇 방울 흘렸다. 그리고 긴 숨이 내쉬고 난 뒤에 .......... " 아빠 돌아가시고 난 뒤, 한 해는 정말 힘들었어요. 애들도 공부를 한 참 할 때라,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힘들었는데, 어머니가 있는 김포에 오면서 성당활동을 하면서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그래서 성당에 갈 때만큼은 1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명함을 내밀면서, 나중에 시간이 되면 연락을 하라고 이야기 하였다. 명함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인 사목부"로 미술심리지도사라는 직함이 있었다.

 

나 또한, 내 마음에 아픈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밖으로 아픈 사람만 보다가 아내가 지금 암투병하고 있다고 하자, 아내의 이름을 묻고 적더니만

 

"제가 꼭 하느님께 아내분의 쾌유를 기원하겠습니다. "

 

골이 깊으면, 산도 높듯이, 즐거운 사람의 근본에는 애절함과 그리움이 가득하길 마련이다. 진정 슬퍼해본자만이, 기쁨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상큼 발랄한 중년의 여인에 가슴에 깊은 심연처럼 슬픔이 있었다.  

 

최근에도 우리 병원에 나랑 친했던 마취과 선생님께서 임파선종으로 돌아가셨다. 그 분도 한 때 치열하게 운동했던 분이셨고, 여전히 뜨거운 심장을 가졌던 분이다. 내가 지역 장애인 사업을 통해 만난 장애인들 진단을 위해  경추 MRI를 찍을라 치면, 아무런 모니터링 없이 손만으로 MRI실에서 장애인들이 편하게 촬영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던 선생님이셨다.

 

마취과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다른 동료가 술 한잔 걸치면서 나에게 이야기 했다.

 

"죽은 사람이야 저 세상에 갔지만,  산 사람은 더욱 힘들어.... 자기는 아무런 생각이 없지만, 산 사람은 그 슬픔까지 껴않으면서 살아야 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