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棟/일기

식자(지식인)

Re-Happy-Doc 2013. 3. 31. 22:00

병원에 진료를 하다보면,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보통은 중년의 아줌마나 할머니들이 많지만, 때에 따라서는 탤런트도 있고, 부자들도 있으며, 간혹가다 종교인들도 있다. 


보통 병원에 통증으로 오시는 분들은 여자가 많으나, 남자들이 병원에 올 때는 반드시 직업을 물어 본다. 왜냐면, 남자가 아파서 병원에 오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고 큰 용기를 내어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 아픈 것을 참아가면서 일을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 토요일에 본 환자는 이름이 김O년이었다. 고등학교때 1학년 2학년 담임 선생님들 모두가 김O년, 김X년이어서 나는 그에게 혹시 안동김씨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 내가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성함이 그렇다고 이야기 하자, 자기는 국학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있으며 조선의 유학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군대 있을 때, 조선의 유학자의 삶에 대해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도대체, 조선의 식자층은 어떤 논쟁을 했으며, 어떤 기준으로 살아왔는가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것은 내가 대학생시절 겪었던 수많은 논쟁들과 본질적 차이가 어떤 것인지 궁금도 했거니와, 군 생활을 하다보면, 갖힌 생활이다 보니, 내 생각에 대해서 반성도 많이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진료시간중에 대화하면서 이제까지 의문점이 많이 풀리게 되었다. 


보통 우리는 역사를 선악의 관점에서 많이 본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살아간 사람이었을 뿐인데, 우리가 현재의 관점에서 그들의 생각을 제단을 했을 뿐이다. 마치 문학평론가나 영화평론가가 작품에 대해서 재해석하는 과정과 같은 것이었을 뿐이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들 


왜 조선은 정약용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 요즘도 그러지 않나요? 책이나 글이나 논문은 교수들이나 쓰는 것이지, 현직 관료들은 바빠서 저술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저술만 남아 있지  그 당시 생활을 하고 현직에 있던 사람들은 업무에 바빠서 그렇게 할 시간이 없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현실적인 이야기를 남기지를 못했죠. 그러니 조선은 정약용의 실학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아 멸망했다는 구도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동인과 서인, 동인은 보통 주리론자로 원리 주의자였고, 주기론자는 현실론자로 서인들이 주장는한 것으로 알 고 있는데, 왜 서인이 인조 반정 이후로 권력을 잡는데, 현실적인 이이의 경장사상을 버리고 주자학에 침착한 것일까요? 


" 서인이 주기론자라고 하지만, 유학자들에게 누군가가 자기에게  주기론자라고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욕이었어요. 서인이나 동인 모두가 주기론자로 불리길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주자학은 어쩌면 1980년대 운동권 이론과 같았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현재말로 옮기자면, 입시 위주의 공부를 하지말고 전인교육, 인간다운 것을 추구하고자 제대로 된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과 별 차이 없지요. 그리고 이이가 경세론자였지만, 동인의 유성룡도 대단한 경장론가였습니다. 그 사람이 가장 현실에 몸담고 백성을 본 사람이지요. 주기론자는 무조건 경세론자였다고 하는 것은 기계적인 판단입니다."


그말을 듣고 나는 뜨끔했다. 우리 시절에 가장 저주스런 말이 "개량" 이란는 말이었다. 현실과 타협한다는 것이었다. 현실과 타협한다. ....... 그럼 지식인은 현실에 살고 있지 않고 어디에서 사는 것일까? 


"조선의 유학이 성리학이후로, 양명학, 고증학으로 발전을 하는 데, 왜 우리는 성리학만 들고 있었나요?"


"성리학은 송나라 학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급진적인 이데올로기였지요. 근데 우리나라에 수입될 때만 해도 그것이 원나라때였습니다. 그때도 old fashioned한 그런 학문이었어요. 그런데, 이 성리학자들이 언제 정권을 잡느냐고 하면 선조 이후에요. 그 때서야 정권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 때 벌써 명나라는 성리학을 폐기처분했습니다. 그러니 조선의  성리학자에게는 이제서야 정권을 잡았는데, 굳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이미 조선시대 정조는 주자대전을 구하기 위해서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성리학은 이전의 화석화된 학문이 되어 관련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그시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통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즉 양명학을 들고 선 "개량" 주의자들에게는 저주의 화살을 날렸던 것이다.그래서 신식 학문은 전주이씨 왕가 종친들 중 불우한 이들에게만 몰래 전수되었다. 


"고등학교 역사책에 보면, 신라말에는 지방호족과 선종이 결합하여 새로운 혁명의 동력이 되었다고 하는데, 왜 고려 왕실을 선종이 아니라 교종을 받아들였나요? 그것도 창조적 소수자가 지배적 소수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를 달리한 것인가요? 고등학교 때보면 개화기시절에 주리론자는 위정척사운동과 연결되어 있다고 되어 있고 주기론자는 개화사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당시 조선말에는 노론이 정권을 잡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론은 위정척사론자였습니다. 고등학교 역사책은 학자들사이에서 consensus가 모아진 것인가요?"


"이전에는 모아졌지만, 지금은 학자들마다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한국사 이해관점이 그대로 투영된 것도 많습니다. "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맑스의 유물사관, 토인비의 "Karma", 랑케의 사실주의 사관으로 나뉘어 진다. 


맑스는 헤겔의 추종자 답게, 역사는 정반합으로 발전을 한다는 관점이고, 토인비는 불교의 영향에 따라 업(Karma)에 의해서 역사가 변화한다고 하였다. 그는 국가 단위의 역사체계를 문명으로 확장하였고, 그는 문명이 생성, 발전, 후퇴, 소멸으르 그리면서  창조적 소수자가 지배적 소수자로 바뀌면서 문명이 소멸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랑케는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 어떠한 후세 역사가들이 자신의 관점으로 재단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실주의 사관을 확립하였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하는 신념을 토대로 세상 모든 것을 우리 기준에 끼어 맞추려고 하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내가 읽은 책중에 하나가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라는 일제시대 일반 민중들의 삶에 대한 책이 있었는데, 그 저자는 고등학교 때 국사책에 따르면 일제시대에는 친일파 아니면 독립운동가밖에 생활하지 않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술도 마시고 춤도 추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일제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수탈정책을 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일제를 받대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이가 들자 드는 생각은 인생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지,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하루의 일상 밥먹고 똥싸고 연애하고, 영화보고 애들을 기르고....... 그 삶들이 모인 것이 어찌보면 역사인데, 그 역사는 표현은 달리해도 본질은 변하지가 않는다는 생각이다. 즉, 사람 몸은 그대로인데, 옷은 스타일이 바뀌는, 그리고 그 스타일이 때에 따라서 반복하는 것 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희노애락의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도 세익스피어의 희극과 비극에  여전히 웃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열심히 사는가 하는 것인데....... 어떤 이론이나 주의에 기대어 살아가기 보다는, 그냥 하루 하루 즐겁게  후회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죽기직전, 살아온 인생을 되새김질 할 때, 멋지게 이 세상과 이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