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저는 대구 토박이었습니다.
대구의 침산동에서 태어나서, 침산유치원, 침산국민학교, 침산중학교를 다녔으며
침산동을 처음 떠난 것은 칠성동에 있는 성광고등학교에 배정받고 난 뒤었습니다.
제가 다닌 성광고등학교는 공장지역에 있는 빈민 거주지역 학교여서 동기생들의 어머니들의 70%가 공장에 일하러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마자 담임선생님은
"우리학교는 너희들이 서울대에 가장 많이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우리는 너희들이 학비가 싼 경북대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동기들 중에 서울대 간 친구들은 문과 한 명, 이과 한 명이었으며
많은 친구들이 학비가 싼 향토대학인 경북대에 갔습니다.
침산동과 칠성동도 대구 북구이고 경북대도 북구 산격동이어서 예과때까지는 대구 북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도 재수 한 차례하고 난 뒤 경북대학교 94학번으로 입학했습니다.
대학교 들어가고 난 뒤에 박노해의 "하늘" 이라는 시를 읽으며 "손가락을 붙이고 뗄 수 있는 의사는 나의 하늘이다." 라는 구절을 보면서 잘린 손가락을 붙이는 의사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는 문학반-병동과 검도반-이검 활동을 하였으며, 아직까지 등단이나 승단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시 읽는 것을 좋아하고 검도하는 것은 지금까지 수련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 의과대학 공부보다는 문학반과 검도반 활동을 더욱 집중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읽었던 시의 감수성과 검도를 통한 내면에 대한 고민이 재활의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저를 지키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졸업무렵, 서울에 가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거니와, 연연생인 동생과 같이 대학을 다니는 문제때문에 서울에 가지 못했다는 생각도 있어서, 수련만큼은 서울에서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턴은 삼성서울병원에서 했습니다. 손가락을 붙일 수 있는 의사가 되기를 바랬지만, 이런 저런 연유로...원하던 과에 합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새옹지마라고 할까요? 떨어진 것 때문에 제가 지금은 사랑하는 재활의학과를 수련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년간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다시금 저는 저의 생활을 반성하였습니다. 전공의를 어떤 것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장애인을 보는 재활의학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야 재활의학이 인기있는 과였지만 제가 지원할 때는 그렇게 지원자도 많지 않았고, 취직 자리도 장애인 시설 위주로 되어 있어 인기과에 비해 수입도 높지 않았습니다.
학생때는 돈을 벌어서 일을 해보자라는 생각이었다면 군대에 있으면서 의사일 자체가 일이 되는 장애인을 위한 과를 하자...그게 그때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연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우연찮게 지금 부천 순천향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상현교수님을 통해서 우리나라 최고의 재활의학과인 세브란스병원의 재활의학과에 지원하게되었습니다.
세브란스 재활의학과 수련은 명성에 걸맞게 수련이 힘들기로 유명합니다. 제가 수련받을 때나,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년차간의 수직적인 관계도 상상초월입니다. 다시는 안볼 것처럼 아래연차를 꾸중하는 윗년차들을 보면서,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동기보다 나이가 많고 타학교 출신인 저는 어서 수련을 마치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갈 것만 생각하고 4년간의 수련을 버텼습니다.
그러나, 인연은 제 의지로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로 내려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2008년부터 일산병원에서 근무하게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뇌졸중, 파킨슨, 치매와 같은 노인성 질환, 근골격 초음파, 근골격계 질환, 연하장애 환자를 주로 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활의학과 재활치료, 치료목표 설정에 대해서도,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 블로그에서 저에게 방문한는 일반인들에게 재활의학과에 대한 소개와 재활의학에서 주로 다루는 질환,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노래나, 책, 운동들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블로거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주인장 김형섭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