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어느 것이 인연이 아닌 것이 있으랴. 다른 인연이 끊어지면 또 새로운 인연이 이어지고.... 살아 있으면서 우연인듯 하다가도 필연인 것 같기도 하고
법구경에 나오는 말처럼 인간의 의지로 되지 않는 것 7가지 중. 생노병사, 죄와 복과 인연이라는 데...... 인연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이어진다.
나에게는 전공의 시절이 아듯한 고향집 풍경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의사 면허증을 받고 난 뒤, 초인적인 인내를 강요했던 시간들이 바로 2004년부터 2008년 사이 전공의 시절이 아닌가 한다.
그 때는 3년차 말이었다. 신촌에서 전공의할 때 였는데, 10월이 넘어가면 보통 4년차들은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느라 진료에 빠지고 그 때는 3년차가 chief resident가 되어 1년차와 함께 환자도 보고, 협진도 봐야 하는, 새벽 세시가 되어도 일이 끝나지가 않았고, 그 큰 세브란스병원에 환자보느라고 돌아다니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속옷은 땀으로 젖기가 일 수 였다.
당시 나는 신촌의 신 모 교수님 밑에서 수련을 받았는 데, 지금도 그러거니와 그 때도 신촌의 교수님은 엄하기로 유명했다. 회진도중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거나 신환 보고를 못할 경우에는 특유의 경상도말과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로 전공의들을 타박하기가 일쑤였다. 요즘 전공의들도 무서워하는 것으로 보면, 나 또한 신교수님을 엄청 무서워했다.
신교수님은 척수 손상을 주로 보셨는데, 하루는 젊은 사내가 경수 손상을 입고 재활병원에 입원하였다. 대부분 척수 손상 환자들은 남자들이 사고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통사고라던지, 아니면 등산하다가 낙상으로 목이 부러진다던지, 이 젊은 사내도 그랬다. 결혼을 마치고 신혼여행에서 다이빙을 하고 난 뒤 목뼈가 부러져 사지 마비가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신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나가 곁에 있었다. 그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듯하게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의무기록지에 담긴 그의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올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하기사 요즘에 박근혜 대통령과 그녀를 배후 조종하는 최순실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상상이 현실화되는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이야기지만, 젊고 전도 유망한 젊은이가 결혼식 다음날 죽음에 가깝게 이르는 사고를 당하고 난 뒤, 신부는 떠나가버리고...... 그의 곁에는 누나가 홀로 간병하고 있었다.
불안과 공포는 지금이 아니라, 내일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 현실화된다는 생각 때문에 현재가 괴로워진다. 앞으로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보통 여기서 의사들이 가지는 마음이 연민이다. 슬픔의 동일화......... 일종의 카타르시스이다. 나의 수련이 힘든 것은 이 사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시절을 그렇게 버틴것 같다.
척수 손상으로 사지 마비가 되면, 팔다리만 마비되는 것이 아니라, 장과 방광도 마비가 된다. 그래서 신경인성 장 혹은 신경인성 방광으로 마비가 와서 배는 부르지만, 대변과 소변은 나오지가 않아 인위적으로 빼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문제는 환자가 아무런 감각이 없기 때문에 재활의학과 의사가 보호자에게 설명을 해서, 의학적으로 문제되는 상황에 대해서 교육을 하고 합병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환자가 신경인성 장으로 헛배가 너무 부른데, 이것이 마비로 인한 일시적인 증상인지, 아니면 병적인 증상인지 구별이 않되는 것이 문제였다. 보통 신경인성 장으로 폐색성 마비가 오면,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나, 환자는 그것을 못느끼기 때문에 의학적 처치를 해야할 지 말아야 할 지 결정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장폐색이 지속되어 장이 터져 복막염이 오게되면, 일반인의 경우 복부 근육이 강직이 와서 손만 가져다 데도 수술이 필요한 복통인지 감별이 가능하지만, 이미 신경이 손상되어 근육이 마비가 되었기 때문에 장이 터진지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 환자는 신경인성 장 폐색이 너무나도 지속되어, 유심히 관찰하던 도중 장이 터저 단순 복부 촬영에서 free air가 보여 응급 수술을 했던 경우 였다. 진단하기도 힘들었거니와 응급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사망에도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그 때는 분초의 시간이 급할 때였다. 수술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수술을 해야하고, 경수가 마비되었기 때문에 호흡근도 마비가 된 상황이라, 수술후 마취에서 깰 때 폐렴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힘든 상황에서 부모도 없었고, 오로지 누나만이 이 힘든 상황을 지켜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일산으로 이동 수련을 받았다. 안타까운 기억만 가지고, 아마 외과에서 수술 이후 중환자실에서 있다가 다시 재활의학과로 전과되었거나 다른 병원으로 갔을 것으로 추측을 했다.......... 늘 그렇듯이 이런 일들은 재활 병동에서는 비일비재하며, 또 새로운 환자의 이야기로 기억 저편에 머물러 있기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 10년이 지났다. 나는 Columbia University Medical Center에서 방문 교수로 내원하였고, 한국인 과학자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매달 마다 한 번씩 있는 세미나에서는 한국인 과학자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서 발표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을 갖는다. 여기서 나는 치매 재활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혹시 2006년도에 신촌에서 전공의로 근무하시지 않으셨어요?"
"네, 그 때 신교수님 밑에서 근무를 했었죠."
"혹시 OO 기억 나시나요?"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혹시 누나? 결혼식 이후로 다이빙 하고 난 뒤 목뼈가 부러진 환자 누나? 인가요?"
그녀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그녀는 내가 수많은 환자들 중에 그 환자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나는 그녀를 Columbia University에서 만난 사실에 대해서 놀랐다.
"어떻게 된 거에요? "
그러자 내가 일산으로 이동 수련하면서 단절되었던 그 이후의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누나는 원래 생물학과 출신으로 cancer 연구를 하는 박사과정에 있었다. 동생이 경수 척수 손상이 되자 마자 연구 분야를 cancer에서 줄기 세포 연구로 바꾸어 현재 모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는 또한 방문교수과정으로 줄기 세포 연구를 하기 위해서 미국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동생은 장애를 가지기 전에도 긍정적인 생각이었고, 척수 손상을 입고 난 뒤에도 무던히 힘든 과정을 잘 견뎌 내었다고 했다. 그리고 같이 경수 손상을 입은 무용가와 재활병원에서 만나 현재는 결혼해도 하고 일산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커피집도 열고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살아 있으면 어디서든 인연이 있게 마련이고 만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인연이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가기 마련이다.
인연 때문에도 힘들지만, 인연 때문에도 살아가기도 한다. 다 그래서 인생이 인연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