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는 내가 전문의를 따고 이 병원에 있을 때부터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꾸부정한 자세에 숨쉬기가 곤란해서 연신 기침을 하였고, 할머니는 다소곳이 할아버지 옆에서 계셨다. 이들 둘 옆에는 할아버지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항상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할아버지 나이만큼이나 만성폐쇄성 폐질환, 요통, 하지 동맥 부전증, 변비, 식욕부진, 전립선 비대증 등 병이 많아서 우리병원 여러 과에 다니고 계셨으며, 요통 치료 때문에 그 노부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요통 및 근육통에 대해서 주사 치료 및 물리치료를 하니,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해서 나에 대한 신뢰가 깊어져,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마침 그 무렵, 내가 개인적으로 엄청 힘든 시기였다. 수련을 마치고 지금 근무하고 있는 병원으로 올 때, 과의 상사로부터 전임의 자격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입사하고 보니 전임의 신분이었고, 1년 동안이나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에 힘들어 했었고, 또 그런 생활을 1년을 더 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좌절을 했었다. 이런 저런 나의 불찰로 여러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 되어 죄책감에 시달릴 때였다. 불면의 날과 죄책감의 마음을 떨치고자 새벽마다 병원 가까운 절에 다니게 되었다. 이후 내 손목에는 수계 기념 단주가 있었다. 할머니 또한 절에 다니시는 분이라, 내 사정과 힘든 이야기를 하자 나중에, 염주와 천원으로 10 만원 묶음을 선물로 주시면서,
“ 김선생, 절에 가서 한 번 갈 때마다 꼭 천원씩 부처님께 시주하면서 기도하세요” 나를 위로 해주셨다.
그렇게, 그들 부부와 인연이 깊어 갔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사소한 일이 있어도, 나에게 꼭 물어보았고, 나도 그들 부부가 아프다고 하면 진료시간과 관계없이 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믿음이 깊어가자 할머니는 조금씩 당신들의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집 양반하고 저는 전남 순천 출신이에요. 결혼하고 난 뒤 그곳에서 살다, 야밤 도주를 해서 간 곳이 인천입니다. 처음에는 고물상부터 시작했어요. 둘이 밤낮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으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스테인레스 밥그릇 잘아시죠? 왜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 80년대만 하더라도 대부분 집에서 그 밥그릇 집을 했어요. 우리집 양반이 인천에서 밥그릇 공장을 크게 해서,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수출 백만불탑 상도 받고 그랬어요.
……….. 조금씩 사업이 되자, 순천에서 친척들이 올라오길 시작했어요. 그래서 집에는 항상 손님들과 친척들로 바글바글 거렸죠. 그 모든 사람들의 뒷치닥거리 혼자서 하느라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
그러면서 할머니는 조금씩 추억에 잠기면서 흐믓한 표정이었다.
“친정 동생이 순천에서 올라와서 우리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줘서 대학까지 보내니, 나중에는 사법고시 합격하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민선 전남도지사까지 했지요. 도지사 마치고 난 뒤 변호사 개업하다가, 요즘에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귀찮아서 인지, 그냥 있는 모양이더라구요.”
그런데, 왜 사업을 그만두셨나요? 라고 묻자
“ 80년대 말에 노동자들이 데모하고 파업을 많이 했잖아요. 그리고 공장 문닫고, 그러면서 좀 힘들어 졌어요. 그리고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하고, 나이도 들고, 자식들도 다 자기 앞가림해서 대학교수로 있고, 먹고 살고는 있으니, 큰 욕심내지 말자고…….. 그러니 그만 두게 된 거에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자, 순천에서 야밤도주해서 인천에 정착, 고물상에서 돈을 모으고 난 뒤, 사업을 시작, 크게 성공하다가 형제들과 친척들의 배신, 낙담, 이로 인한 친인척들간 갈등- 기승전결에 맞게 짜여진 한 편의 드라마가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올 새 해 첫날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항상 병원에 모시고 오는 기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치매증상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연휴기간에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다른 남자와 바람피운다고 가족들 앞에서 칼부림을 했으니 빨리 입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나에게 부탁하였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는가 싶어 빨리 병원으로 오시게 하고는 두 내외를 만나게 되었다.
할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자기가 여기에 왜 있는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께서 최근에 어깨가 불편해서 집 근처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더니 효과가 있어, 할아버지도 좀 맞게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그 한의사를 더러, 왕진을 부탁을 드렸다고 한다. 댁으로 왕진 온 한의사를 본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한의사간의 부정한 관계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시고는 새 해 첫 날 가족들이 있는 가운데서 소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할머니는 가족들 다 있는데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망신을 주어서 부끄러워 말을 못하시겠다고 하였다. 정신과적 응급 상황이었으나, 정신과로는 할아버지가 입원하시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재활의학과로 입원해서 정신과 협진을 통해 치료 해보자고 하면서 할아버지를 입원시키도록 하자, 할머니는
“이 사람은 내가 곁에 없으면 더욱 힘들어 할 거에요. 내가 곁에 없으면 않되요.”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한꺼번에 2인실에 입원하기로 했다.
입원해서 정신과 선생님과 협진을 진행을 하자, 정신과 선생님은 정신과로 입원했으면 어떠했을까 하시고는, 두분 내외가 같이 입원하는 것보다는 할아버지로부터 할머니를 보호해야 하니 할머니만 입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고 하였다. 정신과 선생님과 나와 그리고 그들의 아들과 환자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일단 같이 입원을 하다가 할아버지를 퇴원시키고 할머니는 병원에 더 입원해 있으면서 할아버지와 정신과 외래에서 할아버지를 치료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하였다. 할머니에게도 이런 치료 방침을 알리고서는 할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하였다.
“ 김선생님, 이야기 다 들었어요. 우리 아들들이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하면 될까요?”
“ 네, 당분간은 그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 의사선생님께서 그게 좋다고 하시니, 그렇게 하겠지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
아니나다를까, 다음날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 김선생님, 도저히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요. 나 자신있어요. 이 분이 뭐라고 해도 나 돌볼 수 있어요. 나 이이야기 남편에게 다 이야기 했어요. 남편이 좋아지면 같이 퇴원할께요.”
정신과 선생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최근에 기력이 쇄하여지신 이후로 할아버지 대소변 뒷처리를 할머니가 해 오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곁에 없으면 잠도 못 주무셨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젖가슴을 만지고 자는 것처럼, 할머니 가슴을 만지고 잠을 잤다고 했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듣자 그간 할머니의 고생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어쨌든 최근 할머니의 고생도 있고 해서, 그럼 할아버지만 입원을 더하자고 하고, 할머니를 우선 퇴원시키고 집에서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보면서, 망상 상태가 좋아지면, 집으로 퇴원시키기로 하였다. 약간 정신을 찾은 할아버지에게는 할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서 다른병원에 입원하러 간다고 둘러댔다.
할머니가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가시자, 혼자 입원하게 된 할아버지는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 어이, 김선생, 나, 엄마하고 집사람을 보고 죽으면 원한이 없겠어.”
“ 아니 엄마가 몇 살인데 지금 계세요? 엄마 나이가 몇 살이신데? ”
“ 이른 아홉”
“ 아니 어르신이 여든 넷인데 무슨 엄마가 어르신 보다 나이가 어립니까?” 돌아가신 엄마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 엄마? 허○○”
“ 아니 어르신 그건 사모님 이름이잖아요? 사모님 나이는 몇 살인데?”
“ 이른 아홉”
할아버지가 아내와 어머니를 구별하지 못하는, 소아기로 퇴행된 것이었다. 이튿날도 또 그 다음날도 할아버지는 엄마, 허○○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하고 사모님하고 구별해야만 나았다고 보고 집에 보내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여전히 어머니와 아내를 구별을 하지 못했고, 나날이 아내만 찾았다. 그러다 할머니는 어느새, 남편이 보고 싶었는지 나에게 월요일 한 번만 할아버지 얼굴을 보았으면 한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병을 떠나, 할머니 또한 남편이 자식처럼 느껴졌나 보다. 구정이 있던 주 월요일, 그 부부는 다시 재회를 했고, 병실에서 할머니는 눈물을 쏟아냈다. 자기 남편이 아픈 것이 마치 자기의 살점이 뜯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처럼 느껴졌다.
구정 전 날 할아버지는 퇴원하였다. 퇴원 후 외래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정신과 선생님의 말씀처럼 아내에 대한 망상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빈도나 강도는 많이 줄어들었다. 최근까지 우리병원 재활의학과 외래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시다가, 최근 유행하는 독감에 걸리자 기력을 차리시지 못하시고 다시 입원하셨다. 마치 더운 여름 좁은 어항에서 수면에서 숨을 몰아 쉬는 금붕어처럼, 할아버지는 산소마스크를 낀 채로 숨을 헐떡였고, 할머니도 역시 독감으로 많이 힘들어 했으나, 곁에서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빗으로 곱게 쓰다듬고 있었다.
의대생일 때 사랑에 대한 시를 쓰면서, 사랑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들 것 대한 믿음”이라고 정의 내린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몸은 낡은 수레처럼 삐걱거리며 휘청거렸고 언제가 그 몸이 멈추는 날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끝나겠지만, 한 평생, 힘든 고비 같이 살아온 그들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의 믿음을 발견”한다.
할아버지는 2012년 2월 20일 영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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