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와 같은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가 살아가는 것인지, 내가 살려지는 것인지, 의사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인지 아니면 의사라는 가운이 입혀져 있어 내가 치료 받는 것인지, 나날이 살아가면서, 늘 같은 일상이지만 또한 늘 다른 일상이다.
내가 나온 모교에서는 재활병동이 없었다. 나는 모교 병원에 재활의학과가 있는 것 같았고, 교과과정에 재활의학이라는 학문이 있으니, 수업을 들었지만, 모교병원을 떠나서 서울에서 인턴을 수련을 할 때까지만 해도 재활의학과는 내가 할 수 없는, 아니 내 머리 속에는 있지도 않는 그런 영역이었다. 막연하게 예방이 1차 의학이라면, 기타 임상과목이 2차 의학, 재활의학이 3차 의학이라는 것이 도식적으로 머리에만 박혀있었다. 나는 박노해의 있는 시의 ‘하늘’이라는 시 가운데 “ 손가락을 붙일 수 있고 땔 수 있는 의사는 나의 하늘이다.” 의 말처럼 손가락을 붙이는 수부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선택한 재활의학과는 3년 동안에 있던 내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손가락을 붙이는 의사보다는 그 이후를 다독이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리고 돈 보다는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런 막연한 생각으로 우연한 인연으로 재활의학과를 전공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재활의학과가 인기가 있지만, 내가 지원할 때만 해도 재활의학과가 그렇게 그렇지 않아 내가 수련 받은 병원은 국내 유일하게 재활병원이 있는 대학 병원이었지만 모교 출신들이 많이 지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교 출신 선생님들께서는 학생 때 실습을 돌면서 재활병원에 병원에 입원한 환자 중에 식물인간이 너무 많아서 중앙식물원이라고 부르곤 한다고 했다.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도 그렇겠지만, 의사들 입장에서도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환자들이 보기는 좋다. 재미도 있고, 뭔가 해주는 느낌도 있고, 보호자도 고마워하고, 사실 내가 늘 환자에게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칼국수에는 칼이 없고, 재활의학과 의사는 재활치료를 하지 않고 재활치료는 환자와 가족이 한다”고 하지만, 나날이 조금씩 호전되는 것에 대해서 보호자가 고맙다고 할 때는 내가 뭔가 해 주었다는 뿌듯함에 도취되곤 했다.
보통 환자나 가족들이 병원에 들어오게 되면, 응급실에서부터 시작되는 무시무시한 의학용어에 혼란스러워하고, 신경외과나 신경과를 거치면, 의사의 “죽거나 식물인간이 되거나”와 같은 극단적인 말에 절망한다. 그러다 재활의학과에 오면 어느 정도 현실감각이 생기고, 환자가 나날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고 되면 희망을 가지게 되어서 얼굴에도 약간의 미소가 띄게 되고, 재활의학과 의사가 약간(?) 심한 말을 해도 이전 의사들에 들었던 말을 기억하면 “이정도 쯤이야” 하고 무던히 넘어가게 된다.
회사에서 회의 도중에 쓰러진 그도 그랬다. 뇌교 출혈로 자신이 다니던 큰 기업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입원해 있다가 여기 저기 대학병원을 거쳐 우리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환자는 의식도 없고, 눈도 뜨지 않고, 통증 회피 반응도 없어서, 실핏줄 같은 여린 숨만 이어 오고 있었다. 환자는 회사에서 이제 곧 임원이 될 고참 부장이었다.
입원 다음날, 아침 회진 전에 전공의가 환자 상태에 보고하자 난 어느 때와 다른 환자 같이 “해 줄 것이 별것이 없구나” 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면 이때는 보호자 설득을 해야 한다. 왜냐면 대학병원이라는 데가 보통 검사를 많이 하고, 한 두 달 있으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 저기 병원 밖으로 길로 뿌리는 돈으로 차라리 환자를 간병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사거나 보호자들이 환자를 좀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주택 개조하는 것이 더욱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고 환자와 가족에 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의사의 내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는 말을 해서 보호자에게 섭섭한 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나중에 되면 가족들이 내 말이 옳았다고 여길 것이란 기대 때문에 힘든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50대라는 나이는 한 참 여기 저기 많이 돈 나갈 나이이다.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랐지만 독립하기에는 이른 나이, 이럴 때는 가장이 쓰러지면 집안은 붕괴하기가 쉽다. 환자는 환자대로 쓰러져 있고, 보호자들도 처음에는 열심히 하다가 나중에는 지치게 되어, 가족이란 울타리가 무너지기 때문에 환자도 환자이거니와 산 사람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여러 정황을 살펴서 산재나 기타 환자 본인이나 가족이 든 보험을 잘 수령할수록 도와주는 방향으로 치료 방침이 바뀐다.
보호자는 눈물이 가득한 수심이 찬 얼굴이었지만, 환자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내 눈에는 보호자는 큰 곰 인형을 가지고 인형놀이 하는 것 같았다. 말하지 않는 곰 인형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속삭이는 듯 하면서……
첫 회진 때 내가 보호자에게 “어디까지를 원하십니까?” 라고 묻자, 어느 병원의 모 교수님도 좋아지실 것이라고 하고, 모 대학병원의 교수님은 이 것 때문에 회의까지도 했다고 하면서 막연한 희망을 가슴에 가지는 듯 하였다. 내 눈은 그녀의 손목에 차인 단주를 향했다.
“절에 다니시는 모양이시지요? 저도 이래 저래 힘든 것을 겪고 난 뒤에 절에 다닙니다. 절에서 뭐라고 그럽디까? 땅에서 쓰러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선다고 하지요. 이런 현실을 받아 들여야지만 재활이 됩니다. 이 상태 이상으로 좋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산재 보험은 되었나요?”
그러자 보호자는 이제껏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면서 “ 그런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이 들었어요. 앞으로 앞으로도 좋아질 꺼에요. 선생님께서 안 그러셔도 다 잘 압니다. 그래도 좋아진다고 이야기를 해 줄 수는 없으신가요?”
나는 스님이나, 목사님, 신부님이 아니라고 자위를 하면서, 약간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했다. “사람은 사람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환자가 기능적 호전보다는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방향으로 치료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산재가 되는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와 가족들의 흐느낌을 뒤로 하고 아침 회진을 마쳤다.
의과대학 시절, 내가 환자에게 낮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마음만큼은 서럽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그러나 의사가 되고 난 뒤, 어떤 의사가 되는 것이 좋은 의사인지 환자를 보면서 의구심이 들 때가 간혹 있다. 좋고 아름다운 말을 하는 의사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환자나 가족들에게 당장은 상처가 되더라도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환자를 볼 때마다 고민이 되곤 했다. 왜냐면 많은 환자들이 병원을 전전하다가 가정이 붕괴되고 해체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처음에는 환자에게 매달려 자기의 삶의 궤적을 지워버린다. 그럴 때는 의사들이 조금 현실적인 말을 하면, “어떻게 의사가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라고 말을 하면서 공격적인 언사를 남발한다. 그러다 환자는 호전이 없는데, 병원에서는 여기 저기 옮겨 다니라고 하고, 가족들의 삶이 피폐해지면, 그 때서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 온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집도 없고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서 결국 환자는 요양시설이나 집안에 갇혀있다가 욕창을 비롯한 합병증이 발생하면 응급실로 찾아 오게 된다.
변하지 않는 환자이지만 입원 기간 중에 변화하는 사람은 보호자들이다. 나아지고 나빠지는 것은 환자가 아니라 환자 보호자의 마음이다.
재활 병동 입원 기간 중에는 보호자의 면담이 있다. 이는 환자도 환자이지만 보호자들에게 환자 현재 상태를 설명하고 환자와 환자 가족간의 관계나 경제적 상황을 듣고 치료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다.
“이 남자 너무 불쌍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렇게 어렵게 자라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클 때에도 너무 힘들었다고 해요. 우리가 85년도에 결혼했는데, 그 때는 일만 하는 남자에 대해서 이해도 못하고 불평만 했는데, 이 사람을 알아 갈수록 너무나도 대단하고 착한 남자였습니다. 이 사람 한 평생 일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부처님을 곁에 있는 협시 보살이었다. 고요하게 눈을 감은 부처님을 향해서 그리운 눈빛으로 보좌하는 아름다운 보살, 그녀의 눈에는 눈물과 함께 이제까지의 그 사람과의 지난 기억이 우러나오는 듯 했다.
“ 결혼하고 난 뒤에도 12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어요. 하루는 신혼 때, 집들이 할 때, 상사가 이러더군요. OO씨는 밤 9시가 되면 엉덩이가 집에 가고 싶어 들썩인다. 그 말을 그냥 한 것이 아니라 일 않한다고 타박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런 소리 듣기 싫어서 그렇게 고삐 풀린 말처럼 일만 한 사람이었어요. 아이들이 여기 대학에 다니니 10년 전부터 우리는 주말부부를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아이들 뒷바라지 하고, 남편은 거제도에서 일을 하고 이제 아이들이 졸업하고 취직 하면 좀 같이 살아보려고 했는데……………. 남편이 너무 불쌍해요.”
그래도 내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산재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 보았다. 입원 때부터 산재가 되지 않아, 왜 하지 않았냐고 타박하던 차였다.
“지금 치료비는 회사에서 대 주고 있습니다. 근데 산재는 이상하게 잘 해주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서는 산재로 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서서도 회사에서 묶인 몸이었는데, 누워서도 자식들에게 묶인 몸이었다. 그 사내가 불쌍해졌다. 김훈의 말처럼 남자는 밥벌이하는, 자식과 아내에 입구멍으로 넘어가는 따뜻한 밥 한술의 촉감 때문에 정신없이 일하는 불쌍한 동물- 이 세상의 그 어떤 논리와 철학에 앞서 입속의 촉감 때문에 자신의 삶을 불사른 그 사내- 그가 전생에 무슨 빚이 있어서 그렇게 가족들을 받들어 살고, 또 쓰러져서도 제 몸이 얽혀 있어 빚을 갚고 있는지………
“한 번씩 회사에서 사람들이 나오나 봐요. 그래서 남편 상태를 알아 보고 가는 모양입니다. 제 남편이 그렇게 회사에서 힘들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또 그 회사에서 들어가면 힘들게 사는 것이 눈에 보이는 데 썩 저는 마음이 내키지가 않습니다.”
의과대학생 시절, 운동권으로 살았다. 머리보다는 심장이 더 나대던 시절, 왜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렇게 살아가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내가 의사가 되었다. 삶은 바뀌지가 않았는데, 나는 바뀌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오랫동안 무사히 그 사내가 살아있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존재 자체가 희망인 그 사내, 내가 해줄 것이 없는데, 왜 그는 나에게 해주는지………….
의과대학 시절, 내가 있던 문학반의 이름이 病棟이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병동의 구석에서도
死者에게서 花粉과 옷가지를 발라내는 붉은 손발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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