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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Re-Happy-Doc 2013. 5. 3. 23:54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한국학 중앙연구원 이정철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재활의학과 김형섭

 

 

병원에 진료를 하다보면,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보통은 중년의 아줌마나 할머니들이 많지만, 중년의 남자들이 병원에 올 때는 반드시 직업을 물어 본다. 왜냐면, 남자가 아파서 병원에 오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고 큰 용기를 내어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 남자라는 동물들은 통증의 역치가 높거나, 아니면 아픈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대부분이 아픈 것을 참아가면서 일을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 토요일에 본 환자는 이름이 김O년이었다. 고등학교때 1학년 2학년 담임 선생님들 성함이 모두가 안동 김씨에 년자 돌림자여서 나는 그에게 혹시 안동김씨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 내가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성함이 그렇다고 이야기 하자, 자기는 국학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있으며 조선의 유학 사상이 자기의 전공분야라고 소개 하였다.

나는 군대 있을 때, 조선의 유학자의 삶에 대해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조선의 식자층은 어떤 논쟁을 했으며, 어떤 기준으로 살아왔는가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것은 내가 대학생시절 겪었던 수많은 논쟁들과 본질적 차이가 어떤 것인지 궁금도 했거니와, 군 생활이 주위의 감시에 닫혀진 생활이다 보니, 내 생각에 대해 되돌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당시 읽었던 책들이 주로 재야 사학자 이덕일의 글을 주로 읽었던 것 같고, 저자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울대 사학과 교수님이 쓴 우리가 알아야 할 선비같은 조선시대의 이야기를 읽었던 것 같다.

보통 그 때만 해도, 대동법이 실행이 지연되었던 것은 서인 보수 관료와 기득권이던 방납꾼들의 훼방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을 했으며 실리외교 노선과, 대동법을 통해 민생 회복을 주장한 광해군과 개혁적 동인 세력이 서인의 반동적인 인조반정을 통해서 더디어 졌다고 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와 짧은 진료시간 중에 대화하면서 이제까지 역사에 가졌던 내 상식에 대해서 다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보통 우리는 선악의 관점에서 역사를 많이 본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살아간 사람이었을 뿐인데, 우리가 현재의 관점에서 그들의 생각을 제단을 했을 뿐이다. 마치 문학평론가나 영화평론가가 작품에 대해서 재해석하는 과정과 같은 것이었을 뿐이다.

 

그에게  나눈 이야기 대화들……..

 

Q: “왜 조선 말기 권력층은 정약용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나요?

 

A: "요즘도 그러지 않나요? 책이나 글이나 논문은 시간이 있는 교수들이나 쓰는 것이지, 현직 관료들은 바빠서 저술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재야의 지식인의 저술만 남아 있지 그 당시 생활을 하고 현직에 있던 사람들은 업무에 바빠서 그렇게 할 시간이 없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현실적인 이야기를 남기지를 못했죠. 그러니 조선은 정약용의 실학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아 멸망했다는 구도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Q:”동인과 서인, 동인은 보통 주리론자로 원리주의자였고, 주기론자는 현실론자로 서인들이 주장는한 것으로 알 고 있는데, 왜 서인이 인조 반정 이후로 권력을 잡는데, 현실적인 이이의 경장사상을 버리고 주자학에 침착한 것일까요?

 

A: " 역사책에서는 서인이 주기론자라고 하지만, 당시 유학자들에게 누군가가 자기에게 주기론자라고 불렀다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욕이었어요. 서인이나 동인 모두가 주기론자로 불리길 싫어했습니다. 당시 주자학은 어쩌면 1980년대 운동권 이론과 같았어요. 예전에 유학을 공부할 때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 책을 달달 외우는 유학이었거든요. 그런대 사림이라 불리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현재말로 옮기자면, 입시 위주의 공부 즉 과거를 위한 공부를 하지 말고 전인교육, 인간다운 것을 추구하고자 제대로 된 공부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과 별 차이 없지요. 그리고 서인의 뿌리가 되는 이이는 대단한 경세론자였지만, 동인의 유성룡도 대단한 경장론가였습니다. 그 사람이 가장 현실에 몸담고 백성을 본 사람이지요. 주기론자는 무조건 경세론자였다고 하는 것은 기계적인 판단입니다."

 

그말을 듣고 나는 뜨끔했다. 우리 시절에 가장 저주스런 말이 "개량" 이라는 말이었다. 개량은 원칙은 버리고 현실과 타협한다는 것이었다. 현실과 타협한다. ....... 그럼 지식인은 현실에 살고 있지 않고 어디에서 사는 것일까?

 

"조선의 유학이 성리학이후로, 양명학, 고증학으로 발전을 하는 데, 왜 우리는 성리학만 들고 있었나요?"

 

"성리학은 송나라 학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급진적인 이데올로기였지요. 근데 우리나라에 수입될 때만 해도 그것이 원나라 때였습니다. 그때도 올드 패션드, 한철 지나간 그런 학문이었어요. 그런데, 이 성리학자들이 언제 정권을 잡느냐고 하면 조선시대 선조 이후에요. 그 때서야 정권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 때 벌써 명나라는 성리학을 폐기처분했습니다. 그러니 조선의 성리학자에게는 이제서야 정권을 잡았는데, 굳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이미 조선시대 정조는 북경에 가는 사신을 통해서 청나라에서 주자대전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성리학은 이전의 화석화된 학문이 되어 관련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그 시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통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즉 양명학을 들고 선 "개량" 주의자들에게는 저주의 화살을 날렸던 것이다.그래서 신식 학문은 전주이씨 왕가 종친들 중 불우한 이들에게만 몰래 전수되었다.

 

"고등학교 역사책에 보면, 신라말에는 지방호족과 선종이 결합하여 새로운 혁명의 동력이 되었다고 하는데, 왜 고려 왕실을 선종이 아니라 교종을 받아들였나요? 그것도 창조적 소수자가 지배적 소수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를 달리한 것인가요? 고등학교 때보면 개화기시절에 주리론자는 위정척사운동과 연결되어 있다고 되어 있고 주기론자는 개화사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당시 조선말에는 노론이 정권을 잡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론은 위정척사론자였습니다. 고등학교 역사책의 내용은 학자들사이에서 consensus가 모아진 것인가요?"

 

"이전에는 모아졌지만, 지금은 학자들마다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한국사 이해관점이 그대로 투영된 것도 많습니다. "

 

그러면서 그가 나에게 소개시켜준 책이 바로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있는 이정철이 쓴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두 권의 책이었다.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의 내용은 대동법의 아이디어를 생각한 이이와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이원익, 김육, 조익의  4명의 중앙 관료의 전기이다. 이원익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서인으로,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들이 인조반정 이후로 북인을 숙청한 다음 권력을 잡았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지금으로 비교하면 한국동란을 중심에서 경험한 전전 세대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쳐 조선시대 최대의 환란기를 온 몸으로 경험한 세대이다. 실제로 이이는 선조대에서 사망하지만, 이원익은 선조때부터, 광해군, 인조때까지 영의정을 맡으면서 국정 혼란을 조정하는 관료로 있었으며,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유배까지 가게된다.  김육은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후 가평에서 초가집을 짓고 3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전후, 전쟁 중 일반 백성들이 얼마나 고생하는 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들이 자신의 경험과 삶을 바탕으로 해서 민생의 안정을 위해 마련한 법이 바로 대동법이다.

조선시대의 세금은 크게 땅에 대한 전세,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 그 다음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세나 군정은 백성들에게 국가가 정한 동일한 세금 요율을 받을 수 있었으나, 공납은 마땅한 규정이 없었다. 지금의 예를 들자면, 예전 대구는 섬유와 사과로 유명하였는데, 섬유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기후가 바뀌면서, 대구 백성들이 섬유와 사과를 나라에 바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럼 서울에 남대문 시장 상인이 대구 백성 대신에 청와대에 필요한 공납을 대신하면서 엄청난 이문을 붙여서 이익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고등학교 역사책에서는 대동법이 보수 관료와 지주들의 집단적인 저항으로 인해서 빨리 도입이 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두 권의 책에서는 대동법의 도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단지 자신의 이익을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인조 이후 중앙관료도 대부분 서인이었고, 대동법 도입에 신중한 입장을 취한 김장생과 송시열을 비롯한 산림의 거유들도 서인이었다.

즉 김장생의 대동법 도입의 반대 이유는, 전후로 토지측량(양전)이 부실하고 누락된 것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대동법은 공납을 쌀로, 즉 전세로 바꾸는 것인데, 토지 대장이 부실하면 어떻게 공정한 세금을 납부를 시킬 수 있느냐 하는 주장이었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제도가 도입하기 전에 먼저 토대를 닦아야 한다는 말- 큰 뜻에서는 동의를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하자는 이야기 일 것이다. 다음으로 반대한 주장을 살펴보면, 이전까지의 공납의 대납, 즉 방납은 서울의 어용 상인이 물건만 대어주면 되는데, 쌀로 받는 것으로 바뀌게 되면, 서울로 운반하는 운반비가 발생하게 된다. 즉 수레 나 배를 어떻게 운용을 해야하는 지, 즉 운반 비용을 중앙정부가 내야 하는지, 아니면 납세자인 백성이 내야 하는지, 여름에 바친 쌀이 배를 통해서 서울로 올라가다가 폭풍우를 만나게 되면 추가적으로 그 지역 주민이 다시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아니면 받지 못한 세금을 넘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유민이 발생하면, 그 세금을 누구에게 부과해야 할 것인지, 조선시대의 세금의 폐해중의 하나가 바로 이웃 주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인징과 친척에게 부과하는 족징이 있었다. 이런 폐단을 미리 시정하자는 주장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우선 경기도에만 시범적으로 실시를 한다. 그리고 백성들의 부담이 이전보다 많이 줄어 들어 장점이 보고가 되자, 강원도, 충청도, 호남의 유생들도 자기 지역에서 대동법이 조기 실현되도록 상소를 올리게 된다. 그리고 김육의 대동법 실현의 열망은 아들에게도 전달되어 아들인 김좌명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대동법을 시행하게 된다.

 대동법이라는 제도가 아이디어에서부터 전국에 실현되기까지 무려 200년이 걸렸다. 이제까지 우리는 토지의 주인인 양반세력의 반대로 인해서 더디어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재야세력이며 권력에서 배제된 동인 지식인 반계 유형원의 관점에서 보면, 양반 전주의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반정 이후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 경세가들은 조선시대 집권세력이 지속적으로 제도보완을 하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으로 이러한 대동법이 도입이 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물론 조선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조선시대는 왕조시대이기 때문에 반정과 같은 이변이 없으면, 왕이 자기 재위 기간이나 혹은  후대를 이어가면서 사업을 할 수 있겠지만, 현행 헌법에서 대통령은 5년 이상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개혁적 집권세력들이 좁은 시간적 한계로 이제까지 너무나도 성급하게 가시적인 성과를 원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지금이 않되면 아들 때에서도 이루어야겠다는 김 육의 의지처럼, 그리고 여러 문제점으로 대동법 도입을 반대한 동료 친구인 김집과 수많은 논쟁을 벌이면서도 서로간 인간적인 애정을 버리지 않았던 우정을 보면서, 이제까지 조금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갈등했던 이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맑스의 유물사관, 토인비의 "Karma", 랑케의 사실주의 사관으로 나뉘어 진다. 맑스는 헤겔의 추종자 답게, 역사는 정반합으로 발전을 한다는 관점이고, 토인비는 불교의 영향에 따라 업(Karma)에 의해서 역사가 변화한다고 하였다. 그는 역사의 단위를 국가에서 문명으로 확장하였고, 그는 문명이 생성, 발전, 후퇴, 소멸- 즉 생노병사와 같은 궤적을 그리면서 창조적 소수자가 지배적 소수자로 바뀌면서, 초기의 역동성이 떨어지면서 문명이 소멸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랑케는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 어떠한 후세 역사가들이 자신의 관점으로 재단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실주의 사관을 확립하였다.

 

이제까지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하는 신념을 토대로 역사를 우리 기준에 끼어 맞추려고 하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내가 읽은 책중에 하나가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라는 일제시대 일반 민중들의 삶에 대한 책이 있었는데, 그 저자는 고등학교 때 국사책에 따르면 일제시대에는 친일파 아니면 독립운동가밖에 생활하지 않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술도 마시고 춤도 추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일제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수탈정책을 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일제를 반대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대동법이 시사하는 것-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한다. 일제시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들 어떤 이념이나 신념보다 민중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어떤 도덕 이데올로기 보다 강렬하다. 그러나 우리의 목소리나 주장을 보면 자신감 보다는 패배감이나 열등감, 이를 감추는 도덕적 우월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목소리나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이, 그들을 배불리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