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棟/내가 좋아하는 책들

자전거 여행

Re-Happy-Doc 2011. 9. 15. 22:26

살아가는 것은 마치 발등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죽음이라는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같다. 번쯤 뒤돌아보면, 어느덧 처음 보다 멀리 떨어져 있음을 느낀다. 내일이라도 당장 결승선에 닿을 있지만, 그것이 쉽사리 머리에 닿지는 않지만 이제 두려움은 느낀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지도 벌써 8년이 지났다. 약간은 어색해진 사투리-경상도 말도 아닌, 그렇다고 더더욱 서울말도 아닌 말을 구사하며, 몸과 생활은 서울의 그것에 익숙해져, 간만에 들른 고향은 이제 대한민국의 일부가 아니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학생시절에는 많은 글들을 읽었던 같다. 흑백이 분명한 시대-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시대의 불행이 시인에게는 행운이었던 시절- 많은 말들이 있었고 논쟁이 있었다. 논쟁의 중심의 그들은 세상을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세상을 관조하며 시대의 모든 부조리와 문제점을 쏙쏙들이 알고 있었다. 그들 서로 간에 경미한 관점의 차이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차이는 없었다. 그들의 말은 분명하고 결말이 있었지만, 현학적인 형용사를 많이 쓰고확실히, 단연코, 반드시, 결국등의 단정적인 부사를 사용했던 같다. 30 중반이 되어서야 그들이 자기의 약점을 기만하기 위해 그랬던 것을 이해하게 된다.
김훈의자전거 여행 바쁜 전공의 시절, 그것도 내가 전문의 시험을 공부하던 읽은 책이었다. 수련 기간 중에 책을 읽을 수도 없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정신을 집중을 하는 기간에 머리를 식히려고 읽게 것이다.
김훈의 글은 2년차 여름 호주 학회 비행기에서칼의 노래 처음 접하게 되었다. 느낀 그의 문장은 앙상한 아포리즘처럼 간결하였다. 그의 말에는 과포장하는 형용사와 부사가 없다.
짧은 그의 문장은 숨가쁘게 읽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운이 가볍지는 않다.
자전거 여행 1충무공 ,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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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된 이순신의 칼에는 "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는구나(一揮掃蕩 血染山河)" 라는 검명이 새겨져 있다. '물들일 ' 자의 공업적 이미지는 이순신의 무인다운 내면의 본질이라고 만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은 펜을 자들의 엄살이거나 자기기만이기 십상이다. 말은 정치적이다. 칼을 자들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으로서의 동경한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정직하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위한 칼이었다........

그는 무인 이순신을 어떻게 형상화 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의 시각에서 이순신이 재창조 되었겠지만, 그의 글은 일관적 어떤 관념을 노골적으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에 눈에 비친 세상을 어떤 형용사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의 망월동의 읽어보면, 신군부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 없다. 다만 그는 죽은 자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와 산자의 삶을 간단이 이야기 뿐이다. 그의 글은 상투적인 정치적인 표현이 없지 뿐이지만 오히려 더욱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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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 20주년을 맞는 광주에서는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소설가 임철우의 장편소설봄날 연극으로 꾸며져 광주 공연을 앞두고 있고, 시인 황지우는 ‘5월의 신부라는 시극을 무대에 올린다. 임철우는 시대의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지를 고통스럽게 묻고 있고, 황지우는 치욕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의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삶은 소설이나 연극과는 많이 다르다.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다른 그의 글을 보자.
자전거 여행 2살길과 죽을 길은 포개져 있다.’

너희가 살고 싶으면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해서 황제의 명을 받아라. 너희가 죽고 싶거든 성문을 열고 나와 결전을 벌여 황천의 명을 받아라!’

이것이 남한산성 안으로 들여보낸 청나라 군대의 투항 권유서였다. 문서는 삼엄하고 정연한 현실주의적 어법으로 읽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죽을 길과 살길은 모두 성문 밖에 있다! 성안에는 죽을 길도 없고 살길도 없다! 성안에서 죽을 길과 살길은 포개져 있어서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정당한 자존의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주전파는 황제의 명을 받을 없었고 주화파는 황천의 명을 받을 없었다. 반대일 수도 있다. 주전파도 황천의 명을 받을 수는 없었고 주화파도 황제의 명을 받을 수는 없었다. 황제와 황천 사이에서 남한산성 지식인들은 참혹하게도 갈팡질팡했다. 주전파의 언설이나 주화파의 언설은 모두 가야 길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었지만, 어느 길도 차마 없는 길이었다.

김훈은 세상을 보는데 있어 자신만의 입장으로 보려한다. 그의 이순신은 백척간두에 조국을 구한 장군이 아니라, 프로 축구 선수와 동일한 직업 군인이었을 뿐이다. 영화에 출연하는 악인과 상대자는 단지 배우일 뿐이다. 그리고 삶이라는 현상에 어떠한 주석을 달기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역사는 그때도 그랬으며,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진보나 발전, 혹은 보수는 허위의식일 뿐이다. 말장난이다. 자기기만일 뿐이다. 자체가 실체가 없는데 더욱이 그것을 한정시키는 형용사와 부사는 사족이며 언어의 사치인 셈이다.  그가 2007 4 13 중앙일보에서 도올 김용옥과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자.


역시 '칼의 노래'에서 대중이 사랑한 것은 김훈의 절제된 문체일 거예요. 그리고 문체가 이순신이라는 군인이 치열한 전화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고독한 심리적 내면을 파고들었다는 여태까지의 소설이 건드리기 어려웠던 강렬함이 있는 같습니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가 너무 까다롭고 유미론적이고 너무 체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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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문장을 수사학적 문장이라고 평하는데 오히려 형용사, 부사 없는 글을 쓰고 싶어해요. 주어, 동사의 뼈다귀만으로 동편제 같은 , 서편제의 계면이 빠진 그런 진솔하고 우람찬 우조 같은 말이죠. 그런데 주어, 동사조차 수식이라고 까대면 죽어야죠. 아니면 () 침묵으로 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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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그런 언어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의식이 박약한 자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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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식? 말라빠진 사회의식입니까? 그건 노무현이 자유무역협정(FTA) 한다고 이념적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예요. 진보인 알았더니 보수네? 이따위 얘기들이 모두 개념 규정이 없는 것들에 대해 개념 규정을 하는 데서 파생하는 오류일 뿐이죠. 진보니 중도니 보수니 이따위 말들이 엉터리고, 노무현에게는 애초부터 진보도 보수도 없었던 겁니다. 의미 없는 비연속에다가 일관성을 운운치 말자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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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일관성(moral integrity)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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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목표가 도덕일 수는 없습니다. 이익이죠. 이익 추구에 실패하면 부도덕해질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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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국가의 목표가 도덕적이면 오히려 부강해진다고 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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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까마득한 이상이죠. 그렇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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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 FTA 잘한 짓이고 그로 인해 한국민이 잘살게 되리라고 전망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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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칠 있는 능력은 저에게 없습니다. 단지 우리 사회에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념, 빈부, 교육, 의료, 재산, 기회,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정치적 리더십이 이걸 해결할 있는 카리스마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 주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뜯어내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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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신자유주의 언어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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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인간의 바탕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합니다. 사실 이런 철학을 도올 선생님의 방대한 저작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동의하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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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에도 분명 아나키스틱한 측면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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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말하는 양심이나 자유의지, 이런 것도 우리 존재의 근원이겠지만 저는 폭력과 악이야말로 세계의 근원적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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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에 우리 존재를 내맡기자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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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동학혁명, 볼셰비키혁명이 모두 약육강식에 반대하고 일어났지만 결국 또다시 약육강식에 얽매이는 사회를 만들 뿐이죠. 악에 저항하고 승복하고 저항하고, 그런 모순된 꼬라지가 김훈의 꼴입니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은 도올의 명언입니다. "

대학시절 경북의대 시문학 동아리 病棟 회원으로 있을 습작시를 발표하면 선배들이 명사와 동사를 제외하고 형용사와 부사를 지워 나갔다. 본질은 명사와 동사에 충분히 있으며 시가 가지는 포용성을 오히려 형용사와 부사가 옥죄고 있다고 그들은 이야기하였다.


문학은 삶의 관조이며 자취이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인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학생이 되면 나아지겠지 했고 대학시절에는 의사가 되면 나아지겠지 했고, 의사가 되면 전문의가 되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전문의 되니 이렇게 일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세상 살기가 두려워지고 어려워지는 것은 왜일까?